역사

옷소매붉은끝동 -정조와 의빈성씨

미니하트구름 2022. 1. 2.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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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소매붉은끝동에 나온 이세영 배우와 이준호 배우의 그림이 너무 이쁘게 묘사되어

드라마도 보고 이렇게 역사적인 사실까지 찾아보게 되는구나.

둘의 그림이 너무 이쁘다. 

 

아래 글은 ↓↓↓ 여기 사이트에서 

https://namu.wiki/w/%EC%9D%98%EB%B9%88%20%EC%84%B1%EC%94%A8

의빈 성씨

1. 개요[편집]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 후궁.[9] 본관은 창녕(昌寧). 이름은 덕임(德任).[10]

정조의 첫사랑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후궁들 중 유일한 승은 후궁으로 정조를 15년이나 기다리게 했다. 의빈 성씨는 어릴 때 궁중에 들어왔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총애해 곁에 두고 길렀다.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곽장양문록》 국문 필사에 참여했다.[11]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태도가 단정하고 총명할 뿐더러 재능·기술·예술까지 갖춘 여인이었다고 한다

정조가 내린 승은을 두 차례나 거절하는 등 권력욕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나, 정조가 하인을 벌주자 비로소 후궁이 되었다. 문효세자 옹주를 낳았고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자 한미했던 집안은 외척이 되었다. 이로 인해 오빠 성완(成浣)[12]은 정조에 의해 어영청 군교에서 파면되었으나 성협(成浹)과 동궁의 내례(內隷, 하인)가 되었다. 훗날 성완은 부사용, 성협은 절충장군이 되었다. 고모는 정방(鄭枋), 언니는 홍낙성(洪樂性)의 첩이어서 친인척은 요직에 올랐다. 이에 비해 아버지 성윤우와 어머니 부안 임씨의 추증은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된 지 2년이 지나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옹주는 경기(驚氣), 문효세자는 홍역으로 조졸했다. 뒤이어 임신 중이던 의빈 성씨도 당시로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의빈 성씨의 소원대로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는 효창원 왼쪽 언덕에 마련되었다. 정조의 뜻에 따라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사당도 한 영역에 세워졌다. 정조 말년에 제사궁(祭祀宮)을 의빈궁(宜嬪宮)이라 했고 고종(高宗) 연간에는 칠궁(七宮)에 제향되었다. 순종(純宗) 재위 기간에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 칠궁에서 폐궁되었으나 제사는 원소(園所)의 예를 따랐다. 이후 일제에 의해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2.4. 승은 거절 및 승낙[편집]

1766년(영조 42)에 정조 승은을 내자 의빈은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정조는 의빈의 뜻을 납득하고 물러났다.

1779년(정조 3)에 첫 번째 간택 후궁 원빈 홍씨가 사망하고 1780년(정조 4)에 화빈 윤씨를 간택하자고 했을 때 정조는 새 후궁을 들이는 것을 꺼리다 받아들였다.[29] 화빈 간택 이후[30]에 정조는 의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렸는데 의빈은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이에 화가 난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뜻을 굽히며 승은을 받아들였고[31] 상의(尙儀)[32]가 되었다.
 

2.4.1. 거절의 이유[편집]

의빈 성씨가 정조의 승은을 2번이나 거절한 이유로 다음과 같은 추측들이 있다.
  • (공식적 이유) 왕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고 슬하에 자식도 없는 왕비를 배려했기 때문.
    여러 기록을 통해 의빈 성씨와 효의왕후 김씨의 사이가 무척이나 좋았다는 사실과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가설) 승은 후궁들의 삶이 순탄치 못했기 때문.
    실제로 의빈 성씨가 정조의 승은을 수락하기 이전 조선 후기의 승은 궁녀/후궁들을 보면
    • 귀인 조씨(인조의 후궁) - 사사
    • 승은상궁 이씨(인조의 후궁) - 사사 혹은 독살
    • 승은상궁 김씨(현종의 후궁)[33] - '홍수의 변'에 연류되어 유배
    • 희빈 장씨(숙종의 후궁) - 중인 출신으로 왕비에 올랐으나 결국 밀려나고 세자를 낳았음에도 후에 사사
    • 정빈 이씨(영조의 후궁) - 독살, 후에 아이들도 전부 요절.
    • 영빈 이씨(영조의 후궁) - 역시 요절한 아이들과 직접 기르지도 못했던 하나 뿐인 친아들을 죽여달라 남편이자 왕에게 간청해야 하는 지경에 이름[34]
    • 숙의 문씨(영조의 후궁) - 폐출 및 사사
    • 숙빈 임씨(사도세자의 후궁) - 첫 임신 때 사도세자로부터 낙태 미수 및 잦은 폭행. 사도세자 사후 작호도 깎이고 어렵게 생활[35]
    • 경빈 박씨(사도세자의 후궁) - 사도세자에 의해 살해당함

    물론 숙종의 후궁인 명빈 박씨, 귀인 김씨, 소의 유씨와 영조의 후궁 귀인 조씨처럼 조용하고 평탄하게 산 승은 후궁들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아무래도 후궁 생활을 하는 순간 앞의 예시들처럼 기본적으로 신변에 대한 위협이 따르게 되기 때문에, 든든한 집안이 받쳐주는 것도 아니고 권력욕이 딱히 없는 일반인 입장에서는 두렵고 기피할 법 하다.[36]
  • (가설) 영조 눈치가 보여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전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사도세자는 젊은 시절부터 궁녀들을 취해 후궁으로 삼아 여러 자식을 낳았는데, 영조는 그렇게 태어난 서손자들(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청근옹주 등)마저 싫어할 정도로 세자의 행동을 못마땅해했다.[37] 정조 역시 아버지의 절차를 따라 어릴 때부터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면, 영조의 눈밖에 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의빈이 거절한게 아니냐는 것. 다만 영조 때문이라는 것은 1번째는 어찌어찌 이해한다 치더라도 2번째(영조가 사망하고 정조 즉위 후) 승은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선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 (가설) 정조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
    정조가 의빈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은 많지만[38], 의빈의 정조에 대한 감정을 기록한 사료는 거의 없다.[39] 궁녀는 어차피 궁 소속으로 외간 남자와 혼인하여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당시 일개 궁녀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감히 세손이나 왕의 뜻을 거스르는 것 자체가 뜨악할법한 시절이기도 해서 사실 승은에 대해 선택권이 없다. 그럼에도 첫번째에는 궁녀로서의 목숨을 걸고 효의왕후를 이유로 대며 거절했고, 두번째에는 하인을 벌주는 등 정조의 강압적인 행동 이후 어쩔 수 없이 승은을 받아들인 것으로 되어 있다. 임신이 잦았던 것도 정조가 의빈을 자주 찾았단 증거일 뿐, 두사람의 사랑의 증거라고 착각할 순 없다. 임신이라는 현상이 사람의 뜻대로 되는 일도 아니고 지체 낮은 궁녀 출신 후궁이 이미 직첩을 내려버린 임금을 거절할 권리는 여전히 없기 때문. 덕임이 외부적으로 정조에 대한 어떠한 의사를 비춘 적도 없기 때문에 결국 의빈의 감정은 상상의 영역이 된다.
  • (가설) 자신이 승은을 입는 것이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 정조가 묘사하는 의빈의 성품은 항상 자신의 처우가 과분하다고 여겨 몸가짐을 극히 조심했기 때문에, 가능한 가설이다.

2.5. 자녀[편집]

황윤석은 《이재난고》에서 의빈 성씨가 1780년(정조 4) ~ 1781년(정조 5) 사이에 유산을 두 번 했다고 적었고[40][41] 정조는 《어제의빈묘지명》에서 합궁한 달에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임신했다고 했다. 두 기록이 상반되는데 의빈이 문효를 낳기 전 두 번이나 유산한 일이 사실이면 정조가 《어제의빈묘지명》에 그 일은 굳이 적지 않은 것이고, 거짓이면 호사가들 사이에서 의빈에 관한 소문이 이미 문효세자가 임신되기 몇년 전부터도 파다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왕자(王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 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42]
1782년(정조 6) 9월 7일 인시(새벽 3시 ~ 5시)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문효세자를 낳았다.[43] 이 때 의빈을 딸처럼 키운 혜경궁 홍씨가 본가에서 데려온 몸종 복례[44]와 유모 아지[45]를 보내 출산을 도왔다. 정조는 1782년(정조 6)에 문효세자를 위해 창덕궁 중희당을 건립했다.[46]
“하교하신 대로 소용궁(昭容宮)에게 올릴 빈호(嬪號)에 대한 일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에게 가서 물으니, ‘철(哲) 자, 태(泰) 자, 유(裕) 자, 흥(興) 자, 수(綏) 자[47]가 좋을 듯하나 감히 하나로 적시하여 대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하여, 하교하기를,
“의(宜) 자로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소용궁에게 올릴 빈호를 의(宜) 자로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정관을 패초하여 정사를 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빈(嬪)으로 봉작(封爵)하는 관교(官敎)는 작년에 이미 옥새를 찍어 하비하였으니, 자호(字號)를 정사를 열어서 거행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지방에 있는 낭관을 재촉해서 올라오게 한 후에 전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48][49]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례를 그린 <문효세자책례계병>

의빈은 문효세자가 태어난 날 정 5품 상의(尙儀)에서 정 3품 소용(昭容)으로 올랐고[50], 문효세자가 원자로 정해지고 나서[51] 1783년(정조 7)에 정 1품 의빈(宜嬪)으로 진봉 되었다. 정조가 직접 정한 빈호인 ‘의(宜)’는 ‘마땅할 의’ 자로 ‘마땅하다, 알맞다’라는 뜻이 대표적이지만, 그 외에 '화목하다, 화순하다'(온화하고 어질고 순하다), '아름답다, 선미하다'(착하고 아름답다)라는 뜻도 있다. 《어제의빈묘지명》에 묘사된 의빈 성씨의 행적을 보면 딱 알맞은 한자이다.

1784년(정조 8) 윤달 3월 20일 묘시(오전 5시 ~ 7시)에 옹주를 낳았다.[52] 정조는 “아들이 있는데다가 또 딸이 생겼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53]라고 했다. 그러나 옹주는 5월에 병을 얻어 피접을 나갔고 결국 5월 12일 신시(오후 3시 ~ 5시)에 경풍으로 요절했다.[54] 7월 2일에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55]되었으나, 1786년(정조 10) 5월 11일에 홍역으로 요절했다.

2.6. 비극적인 죽음[편집]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56]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57]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58]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病情奇怪, 竟至於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從今國事尤靡托矣)."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59]

의빈은 마음이 여리고 약해서 칠정(七情, 마음의 병) 증세가 있었는데, 문효세자가 사망하자 곧 중병에 걸렸고 본궁으로 피접을 떠났다가 조금 나아지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왔다.[60] 정조가 그날그날 의빈이 씻는 모습을 보고[61], 약을 조제하고 달일 때 직접 살폈으나[62] 병은 악화 되었다. 결국 1786년(정조 10) 9월 14일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임신 9개월[63]의 몸으로 사망했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정조가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라고 말한 것을 볼 때 당시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64]

 

8. 여담[편집]

  • 장희빈과는 정확히 94년 간격으로 유사한 삶을 살았다. 희빈 장씨와 의빈 성씨 모두 중인 출신 궁녀였으며 각각 웃전인 장렬왕후(숙종의 증조 할머니)와 혜경궁 홍씨(정조의 어머니)의 예쁨을 받았다. 웃전의 처소에서 왕(숙종, 정조)을 처음 만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첫 아이(경종, 문효세자) 출산 시기도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0살로 같으며[133] 둘째 아이(성수, 옹주) 출산 시기도 32살로 같다. 왕의 사랑을 받았으나 각각 43세, 34세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사약, 병사)을 맞는다는 점에서 최후도 비슷하다.[134] 하지만 장희빈이 왕비 인현왕후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과는 달리 의빈 성씨는 왕비 효의왕후와 사이가 좋았다.[135][136] 장희빈이 왕비 자리에 오를 만큼 야심있는 성격이었던 것과는 달리 의빈 성씨는 승은을 2번이나 거절할만큼 욕심없는 성격이었다. 장희빈과 숙종의 이야기가 적힌 《인현왕후전》이 한글 소설이라 장희빈 역시 대중적으로 유명한 반면 의빈 성씨와 정조의 러브 스토리가 적힌 《어제의빈묘지명》은 긴 한문으로 되어있어 대중적으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 정조와 의빈 성씨의 러브 스토리와 의빈에 관한 인적 사항은 정조가 구구절절 의빈에 대한 사랑을 기록한 제문과 여러 궁소식을 기재한 《이재난고》가 비교적 뒤늦게 번역돼서 알려지게 됐다. 정조가 남긴 기록들 덕분에 의빈 성씨라는 인물이 자세히 알려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정조는 《어제의빈묘지명》에서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빈의 흔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아주 사라질 것이다. 이 뛰어난 언행을 내가 글로 적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전하고 알려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애석하다고 하겠는가? 이는 빈에게 한이 되고, 문효세자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 라고 적기도 했다. 2020년대에도 의빈 성씨에 관련된 자료가 번역이 덜 된게 있다고 하니 추가적인 자료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9. 대중매체에서[편집]

임금 정조를 15년이나 기다리게 만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지만 이와 같은 사실이 적힌 《어제의빈묘지명》이 한문으로 기록되어있어 번역되지 않아 21세기 초까지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본명, 가족 관계 등이 적힌 《이재난고》도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도 정조의 유일한 승은 후궁이었다는 점 때문에 소설, 드라마에서 주로 정조가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비극적인 죽음[137]을 맞는 정조의 첫사랑[138] 정도로 그려지긴 했다. 2005년 로맨스 소설에 처음 등장했고, 일반적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모습은 한지민이 연기한 드라마 《이산》 속 성송연 캐릭터. 이후 정조를 다룬 창작 뮤지컬 《정조 - 만천명월주인옹》에도 등장하였다. 실제로는 궁녀 출신이나 도화서 다모, 호위 무사 등으로 각색되어 등장하였다. 본명은 '성덕임'이나 작품마다 '성송연', '성선우', '성연' 등 각양각색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정조와 의빈이 약 10세 전후에 만났다는 사실과 정조가 그녀에게 15년 동안 2번 고백하였다가 차였다는 흑역사를 기록했다는 사실 등 드라마같은 실화가 있지만, 이 사실이 2016년쯤에 알려져서 이를 다룬 드라마는 이전에는 없었다. 이후 의빈 성씨와 정조를 다룬 소설 《옷소매 붉은 끝동[140]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 2021년 하반기 MBC에서 방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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